|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짐에 따라 우리는 그분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점점 더 전체적으로 인식하고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현존하시며,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적을 몰아내야 합니다. 잘못된 생각과 용서하지 못한 일이 바로 적입니다. 용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성전으로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자비로운 힘과 지혜의 정화 작용을 경험하고, 변화된 존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정화되어 하느님께 봉헌된 존재는 거룩합니다. 그런 존재는 주변 세계에 '구원자'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용서의 경험을 통해 정화되고 봉헌되면, 자연스럽게 축복하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 안에서 치유가 일어났기에 세상을 복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용서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를 통해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생채기를 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하는지요. 용서가 단지 의지의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순종하는 것으로 충분히 용서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나 온 마음으로 용서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부족한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됩니다. 이런 경험이 일회적으로 남지 않고, 삶의 틀이 되게끔 우리를 인도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기도 생활의 은총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갈증과 동경을 느낍니다. 이런 갈증과 동경이 우리를 기도로 이끕니다. 우리는 심호흡을 하고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고는 하느님의 부드러움과 고요의 옷을 입습니다. 기도할 수 있기에 때때로 오는 압박과 시련, 역경 앞에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 시간은 사랑의 원천입니다.
맑고 부드러운 영으로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귐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기도를 통해 받는 사랑과 친밀함은 속사람이 경험하는 가장 강력한 하느님의 증거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사랑을 받고, 사랑은 우리의 기도를 정화합니다. 기도의 본질은 상호작용입니다. 기도는 나눔입니다. 가슴은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기울고, 거룩한 평화가 생겨납니다. 그 무엇으로도 망가뜨릴 수 없는 평화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침묵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마르지 않는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는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집니다. 사랑은 텅빈 상태가 아니라 가득 찬 상태입니다.
마음의 고요를 방해하지 않도록 호흡도 천천히 합니다. 기도를 통해 받은 사랑으로 우리는 사랑이 됩니다. 받은 것을 일상으로 흘려보내는 행동은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주변 세계에 선물하는 일입니다. 받지 않고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을 받아 그것을 현재에 선물합니다. 그렇게 현재에 하느님을 선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갈라2,20)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현재를 사랑할 수 없고, 현재를 사랑하지 않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 사랑을 받으므로, 기도 안에 살지 않고는 주변 세계를 사랑할 수 없고, 소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그로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골방'으로의 퇴각, 하느님께로 무조건 퇴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든 마음에는 영원의 열쇠가 놓여 있습니다. 이 열쇠가 우리 삶의 의미를 열어 줍니다. 우리가 이 사랑 안에 머물면 우리는 합일 가운데 있게 되고, 기도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이런 사랑 안에 살게 됩니다.
"스스로 너무 비하하거나, 자신의 말과 행동이 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음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우리가 왕의 딸이며,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자아는 '너 자신을 하찮게 여기라'고 부추깁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네 존재를 너무 하찮게 여기지 말라'고 다독입니다. 자신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은 교만한 태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우리 안에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여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 현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그리스도 없이 살도록 부추기는 교만을 거절하십시오.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셨는데, 한사코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마음을 조아리십시오. 마음이 약해지거나, 세상이 주는 실망과 장애물로 말미암아 사랑을 잊어버렸다면, 다시금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기도는 우리 삶이 표류하지 않게 붙들어 주는 닻입니다. 기도는 삶의 대동맥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주변을 축복하고 자신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습니다. 받지도 않은 것을 내주라고 자신을 다그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축복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사랑으로 합일되는 것,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 앞에 벌어지는 여러 사건 안에서 명백하게, 혹은 암시적으로 하느님을 보거나 듣거나 느끼는 일은 기술적으로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담은 기도,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하느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학습 프로그램입니다.
우리 안의 쓴 뿌리들,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한 것들은 외부 세계와의 만남에서 공격적이고 조급하고 편협하고 가르치려 하고 무시하고 판단하려는 태도를 유발합니다. 얽매인 것들은 늘 내면의 적과 싸움에 휘말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사랑 안에 머물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힘겹습니다. 자신 안에서 반목하고 갈등하고 하나 되지 못한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의 목소리는 지금 자신이 너무 희생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은 자격 없고,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며 죄책감을 부추기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죄책감을 하느님처럼 숭배하면 하느님이 기뻐하시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용서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스스로를 거부하는 마음이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 안에 희생자의 지위를 만들어 주고, 자기 연민으로 마음의 상처를 굳힙니다. 그렇게 우리는 내면의 적이 걸어오는 싸움에 말려듭니다.
그런 싸움에서 적을 몰아내기가 어렵지 않음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 경험은 얼마나 압도적인지요. 싸워 이겨서 적을 몰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쓴 뿌리를 극복하기가 전혀 힘들지 않음을 배웠습니다. 쓴 뿌리들은 용서를 통해 놀란 새떼처럼 도망가 버립니다. 이런 경험은 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안간힘을 다해 악과 싸우다 보면 오히려 악을 치명적으로 숭배하게 됩니다. 악은 이런 전쟁 상태를 좋아합니다. 우리의 모든 주의력을 자기에게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묘하게 악을 숭배하게 되지요. 우리가 영적 치유의 길을 걸을 때 악은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악은 그냥 의미가 없어지지요. 사랑이 우리를 옭아맨 사슬을 풀면서, 악으로부터 해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본질입니다. 싸움을 통해 적을 몰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의 악을 억누르려 하는 대신 선을 장려함으로써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바로 축복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우리를 존재의 원천으로 이끌어 주는 은총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은총에 투항하고 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에게서는 그런 태도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축복하는 아우라, 축복하는 가슴, 하느님 현존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북돋우는 사람들입니다.
용서는 우리 안에서 주의깊게 작동하는 힘입니다. 용서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소리는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아직 용서하지 않은 것들을 상기시킵니다. 듣고 보는 기도를 통해 그 모든 기억이 지나간 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찾아옵니다. "용서하겠니?" 용서를 통해 우리는 부드럽고 겸허한 하느님의 현존에 참여하게 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