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톨스토이의 시선, 「안나 카레니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일컬어 “예술작품으로서 완전무결 하다.”라는 경의를 넘어선 찬양을 표했습니다. 사랑과 이별,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인간의 고뇌를 유려하고도 세밀하게 표현해낸 책, 바로 「안나 카레니나」입니다. 너무 오랜만에 읽은 고전 장편소설이라 책을 읽기 전부터 이번에는 꼭 감상을 정리해보기로 다짐했고, 또 읽으면서 생각이 깊어지면서 다시 한 번 책을 다 읽은 뒤에 글로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뛰어난 필력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담담하게 제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볼품없는 글을 써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산위의 마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용기내어 제 생각을 올려봅니다. 사실, 저는 사상가나 문학가로서의 톨스토이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학교 도서관 어딘가에 꽂혀있던 책 속에서 부패한 현대 그리스도교를 배척하고 새로운 목소리를 낸 인물로 묘사된 톨스토이. 그리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어릴 적 깨작거렸던 「톨스토이 단편선」과 「전쟁과 평화」. 이것이 내가 아는 톨스토이의 전부입니다. 그런 제가 이곳 산위의 마을에 오게 되어, 저녁 기도 때 마다 톨스토이의 묵상들을 접하게 되고, 톨스토이의 역작이라고 불리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톨스토이의 사상도, 부패한 종교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아닌 인간을 바라보는 톨스토이의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사랑과 탈선, 그리고 죽음 러시아 사교계의 여왕이자 성공한 정치인인 카레닌의 부인인 주인공 안나는 그녀의 오빠 오블론스키의 불륜을 해결하고 그의 아내 돌리를 달래 둘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우연히 오블론스키의 친구이자, 돌리의 동생 키티의 연인인 브론스키를 마주치고,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같은 날, 오블론스키의 친구 레빈은 키티에게 청혼하기 위해 오블론스키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키티는 레빈과 브론스키 사이에서 갈등하며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고, 낙담한 레빈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골로 돌아갑니다. 한편, 안나는 무도회에서 브론스키와 재회하고, 키티와 브론스키가 주인공이 되어야 했던 무도회에서 안나와 브론스키는 함께 춤을 추며 점점 사랑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날부터 안나는 유부녀인 자신의 처지와 점점 도태되어 가는 자신의 결혼생활 사이에서 갈등하며 브론스키와 외도를 즐기는 시간이 점차 많아지고, 결국엔 남편에게 자신의 심리 상태를 털어놓기에 이릅니다. 이미 사교계의 떠도는 소문으로 아내의 외도를 알고 있었던 카레닌은 사랑보다는 자신의 명성에 흠이 될까 두려워 브론스키에게 결투를 신청하거나 아내를 눈물로 잡지 못하고 단지 안나에게 사람들의 눈에 띠지 말 것과, 브론스키와는 만나되 자신과는 쇼윈도 부부로서 계속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모습에마저 실망한 안나는 결국 브론스키와 함께 떠나게 됩니다. 자신이 선망해 마지않던 안나가 연인 브론스키를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키티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고, 병을 얻기에 이릅니다. 그때까지도 키티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귀족이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고 있던 레빈은 또다시 키티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부부가 되어 행복한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안나의 상황은 점차 나빠져만 갑니다. 그녀는 이미 남편을 버린 더러운 여자로 낙인찍혀 사교계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없었고, 사교계의 인기로 정체성을 형성했던 그녀였기에 점차 정신적으로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이와 함께 군인이었던 브론스키가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을 점점 의심하게 됩니다. 오직 사랑만을 믿고 내던진 삶이었기에, 그 사랑을 잃었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삶에 대한 의지 또한 잃어버리고 결국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맙니다. 누가 악인인가?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인간적인 것들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톨스토이의 사랑 이야기 속에는 악인이 없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늘어나는 아내의 주름살에 환멸을 느껴 가정교사와 외도를 한 남자. 자신을 선망하는 여인의 연인을 빼앗고 남편을 차갑게 버린 여인. 사랑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여인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남자. 그 누구도 그의 소설 속에서 악인으로 비추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사실 소설의 줄거리는 크게 새롭거나 파격적이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당시 유행했던 작풍에 비교하더라도 지극히 고전적이며 심지어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출간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는 이유는 아마도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세밀한 심리 묘사인 듯 합니다. 그 세밀한 심리 묘사를 통해서 악인은 사라지고, 단지 사연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만 남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요. 타인이 나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우리도 결국은 내게 보여 지는 단편적인 모습들만을 가지고 타인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사실 소설 속 인물들이 저지른 일들을 그 사건 자체만을 바라보자면 도덕의 법정에 세워야 할 인물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전지적 독자의 시점에서 인물들의 심리와 모든 이해관계를 파악하며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 인물의 어떠한 도덕적 흠결에도 어느새 연민을 느끼고 이해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현실 속에서 상대방의 기분과 감정, 심리 상태,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앞에 서기 전까지 겪은 일들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오해하고, 다투고, 미워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남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까지는 주시지 않았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오해하며 살아야 되는 운명이며, 조금 나은 경우에도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라는, 관계성에 대해 다소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런 제게, 어쩌면 우리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들의 첨예한 내적 갈등과 심리 흐름을 통해 인물 개개인에게 사연을 부여하면서 톨스토이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남을 판단할 권리가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과거와 가치관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의 행위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 전체를 가지고 남에게 판단 받을 권리가 있음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타인의 과거나 생각을 모두 알 수는 없더라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과거’가 있었으며,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짐작이, 충돌을 일으키기 싫어 그 순간을 그냥 넘어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돌고 돌아 그 순간을 맞이한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덧 대림 2주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불을 붙인 연보라색 초는 자기 색을 잊은 채 분홍빛으로 빛납니다. 우리도 얼마 남지 않은 대림 시기동안 일상 안에서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보다는 ‘저 사람에게는 어떤 과거와 상처가 있었을까’를 생각하며 완고해진 마음을 녹이고 보다 연한 색으로 빛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