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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를 대하는 두가지 태도
작성자 : 공원표야고보 조회 : 38           2022-08-06 15:29:05
  나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 자존심과 자존감

  인간은 태어나서 자아를 인식하고 마주하면서 타자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이 건강하지 못하면 자아는 왜곡된다. 올바로 자아를 인식하는 길은 어떤 길일까? 

  인간은 모두 자아를 긍정하고자 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자존이야말로 모든 관계 이해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긍정은 자존심이라는 문제를 야기하고, 지나친 자기부정은 자좀감의 결여라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다시 말해 자존심과 자존감은 모두 자신을 좋게 평가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지만 자존심은 병적인 현상에 속한다. 곧 자기긍정의 지나친 경직화, 이데올로기화하는 심리적인 결석현상이다.
  
  자존심은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얻는 부정적 긍정이며 자존감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수용적 긍정이다. 이에 따라 자존심은 끝없이 타인과 경쟁 속에서만 자아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믿음이기에 경쟁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객관적 자아를 유지한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끝자리 단어 하나로 구분되어서 애매모호하다. 영어에서는 자존심(pride)과 자존감(selfesteem)으로 구분되니 명확하다. 그래서 이 두 용어에 혼선이 있고 이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애매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 자존심 상해" 라는 표현의 상황은 사실은 상대로 인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가 폄하되는 경험, 곧 자존감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본문 역시 사회적 통용어로 자존심이란 단어를 쓸 수 밖에 없지만 자존심의 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자존심은 자만이나 교만으로 번역되었어야 자존감과 쉬이 구분된다.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억지로 지키려는 마음이다. 자존심이 낮은 사람은 쉽게 당혹해하고 부끄러워하며 타인에 대한 승인 욕구가 강하고 자기비하나 열등감을 갖기 쉽다. 자존심이 너무 강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인정해 주기보다는 내가 잘났다는 것을 남에게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라고 한다.

  반면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이라 말하는데, 곧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자기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자신의 능력을 믿으며 자신의 노력에 따라 성취를 이뤄 낼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기 확신이다. 자존감이 잘 형성된 사람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며, 다른 사람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보인다. 

  자존심적인 표현은 "내가 제일 예뻐, 내가 제일 공부 잘해"라고 말하는 비교우위적 개념인 반면, 자존감은 "나는 공부는 못하지만 친화력이 좋아!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매력은 있지" 등과 같은 객관적인 자기평가이다. 자존심이 높은 사람은 원인과 결과를 "남"에게서 찾는다고 한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모든 원인과 결과를 "나"로 부터 찾아 남 탓을 하지 않는다.

  행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자존감을 돌아보라. 튼튼한 자존감은 행복의 시작이다. 자존감은 우리 마음의 면역시스템과 같이 자존감이 약할 때는 쉽게 외부적 스트레스에 압도당하게 되며,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예민해지고 상처받기도 쉬워진다. 자존감의 결여는 행복하지 않은 첫 번째 이유다. 자존감의 힘을 키워야 한다.

  아프리카의 이야기 중에 자존감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한 서양 의사가 흑인 여인을 사랑했고 그 처녀와의 결혼을 꿈꿔왔다. 어느 날 결심을 하고 처녀 집에 가서 구혼을 했고 승낙을 받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어떻게 저런 흑진주 같은 아내를 얻었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우리 마을에선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암소 받고 딸 주세요' 하는 풍습이 있었지. 보통은 특등 신붓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은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의 신붓감이라면 암소 한 마리로도 승낙을 얻을 수 있었네. 그런데 나는 아홉 마리의 암소를 끌고 갔지."

  친구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하자 그는 말을 이었다. "그때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여자들의 세계에선 중요한 문제였네. 사실 아내는 한 마리의 암소면 충분히 혼인승낙을 받을 수 있었지. 그러나 내가 정말 사랑한 여인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한 마리의 암소 값에 한정하고 평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네. 자신을 두 마리나 세 마리를 받았던 처녀들과 비교하면서 움츠려져 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청혼 때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평생 자기 가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세 마리를 훨씬 뛰어넘는 아홉 마리를 생각해 낸 것이지. 결혼하고 나서 아내에게 공부를 하라거나 외모를 꾸미라고 요구한 적인 없었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사랑했고, 또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주었을 뿐이지. 처음에는 무척 놀라워하던 아내도 차츰 나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지. 혹시 '나에게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네. 그 후 아내는 '암소 아홉 마리' 에 걸맞은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네. 그러는 사이에 아내는 더욱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져 갔고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내를 똑같이 사랑하지만, 이제 아내는 결혼할 당시의 모습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것 같네."

  나는 이 이야기가 자존감을 설명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성서상의 예를 보더라도 이 두 개념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마르타의 자존심과 마리아의 자존감은 대비를 이룬다. 두 자매는 모두 주님을 대하는 자세에 정성과 사랑이 가득하지만 마르타는 문득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 마리아를 흘겨보았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동생을 고발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무 말이 없다. 자존감은 외부적 영향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정중동(靜中動), 진중한 마음이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자존감은 모든 자존심을 넘어선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말씀하신다. 만약 그녀에게 자좀감이 없었다면 떠보시는 예수님의 언행에 자존심 상하고도 남을 발언이지 않은가?

  스승을 배반한 베드로에게 여인들이 "당신은 한패 아닌가요?" 묻는다. 베드로는 화를 내며 "아니요" 라고 강하게 반발하지만 이미 그는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상태이다. 훗날 주님은 자존심으로 상처를 받은 그의 자아를 자존감으로 치유시켜 주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들을 쳐라."

  자캐오 역시 교만한 마음으로 세상을 저주하고 한탄했지만 자존감으로 승화되었다. 나무에 오른 그의 자존심이 예수님에 의해 건전한 자기긍정으로 수용되자 난쟁이 자캐오는 자신의 단점마저 긍정할 수 있었다. 자기 성숙은 아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진실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잘 배운 부자청년과 밤에 찾아온 니코데모는 모두 자존심의 상처를 받고 떠나간다. 진실을 마주 대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부자청년은 그 뒤로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니코데모는 자존감의 회복으로 되돌아왔다.

  개념을 파악했으니 이제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해 보자. 자존심이 강한 사람과 자존감이 충만한 사람이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문제와 충돌은 있다. 수많은 자아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이질감 속에서 생기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의 미묘한 긴장과 줄다리기적 상황 속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은 누구일까? 항상 화해하고자 하고 상황을 정리하려는 사람은 누구일까? 자존심일까 아니면 자존감일까? 자존심이 강한 남편과 자존감이 강한 아내가 의견대립을 이룰 때 결국 화해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누구일까? 삶의 지혜와 여유, 공존과 평화는 자존감에서 나온다.

  한국 가정의 가장 큰 문제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유교적 권위가 남성편향적이기에 그 영향 하에서 가장에게는 권력을 정당화하도록 사회가 용인해 주고 있는 현실은 한국 가정의 불행과 직결되는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권위는 자존심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가정에서의 갑질 같은 문제는 비민주적인 폭력성을 내포할 위험이 있다. 사랑이 없는데 자존심으로 가정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대천사의 엄청난 메시지를 들었을 때 즈카르야는 비웃었지만 마리아는 의문점을 겸손되이 물었다. 전자는 비천한 자아 속에 담긴 하느님의 크신 뜻을 불가능으로 이의 제기했지만 후자는 불가능의 사실에 대해서만 질문을 한 것이다. 전자는 자존심적 발언이고 후자는 자존감적 발언으로 보인다.

  하느님의 모상은 자존감의 원천이고 원리이다. 우리는 모두 원래 하느님의 모상대로, 하느님의 이미지를 받아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은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기에 겸손과는 구분되는 자기긍정이다. 하느님 안에서 자존감을 지니는 사람은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고 하느님 역시 우리의 과장된 겸손, 격에 벗어난 자기비하나 자기폄하를 원하시지 않을 것이다. 참된 기도 역시 객관적인 자기평가에서 나온 자존감의 문제에서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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