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사이트맵 | 즐겨찾기등록
산위의마을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제   목 : 나라는 말
작성자 : 공원표야고보 조회 : 297           2022-10-02 20:45:09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는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심보선, '나'라는 말-
No | 제목 | 첨부 | 작성자 | 조회 | 등록일
818 연중 제26주일 (0)   공원표야고보 887 2022-10-02
817 연중 제27주일 (0)   공원표야고보 723 2022-10-02
816 피난의 섬 (0)   공원표야고보 742 2022-10-02
815 9월 29일 대천사 축일 (0)   공원표야고보 714 2022-10-02
814 나라는 말 (0)   공원표야고보 297 2022-10-02
813 지금도 늦지 않았다 (0)   공원표야고보 258 2022-10-02
812 이별 (0)   공원표야고보 366 2022-09-07
811 연중 제15주일 (0)   공원표야고보 345 2022-09-03
810 연중 제16주일 (0)   공원표야고보 427 2022-09-03
809 우리 삶에 미치는 두려움의 작용 (0)   공원표야고보 373 2022-09-03
808 삶이란 (0)   공원표야고보 315 2022-09-03
807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0)   공원표야고보 304 2022-09-03
806 7월 25일 성모님 메시지 (0)   공원표야고보 281 2022-09-03
805 연중 제18주일 (0)   공원표야고보 262 2022-09-03
804 우리 살아가는 길에서 늘 확인해야 할 것 (0)   공원표야고보 293 2022-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