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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연중 제16주일
작성자 : 공원표야고보 조회 : 402           2022-09-03 06:05:57
2022년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D+531)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이며 농민주일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처럼 우리도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잘 영접할 수 있도록, 또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 인간의 모습으로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가정에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모실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농민들의 수고와 노력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기후 위기를 겪으며 우리는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존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겨야겠습니다.

  찬미예수님!

  오늘 1독서인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이 손님들을 영접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여름 대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천막 어귀에 앉아서 쉬고 있던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은, 웬 나그네 셋이 다가오는 것을 봅니다. 이미 1절에서,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하고 말함으로써, 그 길손들이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서는 그들이 그렇게 고귀한 손님들일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그저 뜨거운 날씨에 길을 걷느라고 고생하는 여행자들일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 길을 떠나십시오.’”

  물론 아브라함이 땅에 엎드렸다거나, 손님을 “나리(직역; 저의 주인님)”라 부르고 자신을 그 손님의 “종”이라 일컬었다는 사실은, 그 손님들이 평범한 길손이 아님을 아는 성경 저자의 의도적인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낯선 여행자를 매우 정중히 대하는 고대 근동의 관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아내 사라에게 빵을 만들라 하고, 또 “소 떼에게 달려가” 육질이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요리하라고 하인에게 줍니다. 아브라함은 이어서 자기가 직접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손님들 앞에 차려놓고, 그들이 먹는 동안 나무 아래에서 서서 그들을 시중듭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또한 모든 신앙인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이 이후 구약성경은 물론,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에게도 손님 접대의 본보기가 됩니다. 물론 민족마다 나름대로 손님들을 후하게 대접합니다. ‘손’에다 ‘님’자를 붙이는 우리 민족에게도 손님을 정성껏 모시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손님 접대가 특수한 배경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 척박한 광야에서 살아야 했던 유목 생활입니다. 인적이 드물고 숙박이나 공공시설이 없는 거친 환경 속에서 길을 떠나는 것은 아주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나 사막에서 사는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서로 도와야 한다는 필요성과 당위성이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또한 낯선 사람을 통해서 다른 세계를 접할 수 있다는 것도, 그를 손님으로 맞아들이게 하는 한 요인이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스라엘에서는, 다른 유목민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 단순한 예의 차원을 넘어서는 의무로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에게 ‘손님’은 보통 아는 사람이거나 적어도 무슨 관계가 있는 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에서는 일차적으로 전혀 모르는 여행객이 영접받습니다. 알든 모르든 곁을 지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 이를 집에 모셔 정중하고 융숭한 대접을 베푸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실은 성심껏 성찬을 베풀고 손님과 함께 즐겁게 지냅니다. 그리고 떠날 시간이 되면, 길을 나서려는 손님과 더 있다 가라고 붙잡는 주인 사이에 인사말이 길게 오가기도 합니다.

  손님에게는 대접해야 할 뿐 아니라 보호도 해주어야 합니다. 제집에 들어온 손님의 안전에 대해서 주인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접대가 잘 이루어졌을 때는, 손님도 주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갚아 둘 사이에는 서로 이익이 되는 상호 관계가 성립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후한 대접을 받은 나그네들은, 이미 늙어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주인 부부에게 일 년 뒤에 아들이 생기리라는 약속으로 호의에 보답합니다.(창세18, 9-15) 이 이야기에서 손님 접대라는 사람들 사이의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고 실행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 호혜적 관계를 무시하면 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구가 많아지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손님 접대라는 성스러운 관습에도 부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는 ‘손(님)을 치르다’라는 우리말의 표현이나 ‘손은 갈수록 좋고 비는 올수록 좋다’라는 우리의 속담, 또는 ‘생선과 손님은 사흘만 지나면 냄새가 난다’라든가 ‘손님과 비는 사흘이 되면 짜증스럽다’라는 서양의 속담처럼, 어떤 민족에서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손님 접대가 이스라엘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또는 당신의 대리자를 통하여 손님이 되기도 하실뿐더러, 더욱 근본적으로는 주인 그 자체가 되기도 하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나 기드온 이야기에서처럼,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또는 그분의 사자(使者)를 손님으로 대접할 수 있음을 명백히 밝힙니다.

  다른 한편, 이스라엘인은 자기들이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의 자손들로서, 평생토록 하느님의 손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치게 됩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돌아다닐 때, 손님이 주인에게서 음식을 받아먹듯,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저마다 제집과 토지를 가진 다음에도, 땅은 주님의 소유임을, 자기들은 그분 곁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인간만이 아니라, 온 자연까지도 날마다 먹여 살리는 주인이시라고 찬미하기에 이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원이름은 “주님(하느님)의 집”입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성전은 이러한 ‘주인’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그분의 집인 것입니다.

  종교 생활의 중심인 성전에서 거행되는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과 하느님의 관계가 주인과 길손 사이의 관계임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께서 성전에서 당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극진한 손님 접대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집을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평생토록 살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유다인들은, 손님 접대에 주변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큰 정성을 기울입니다. 신약성경 역시 손님 접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 자체가 손님 접대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활동이 그분 말씀처럼, 객지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히 이 사람 저 사람의 손님이 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초대교회의 사도행전은 손님 접대 이야기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다른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예수님의 중요한 일과가 됩니다. 먹고 마심 자체가 그분의 사명 수행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공공연히 죄인으로 멸시받는 이들과 함께 묵기도 하시고, 식사도 같이하심으로써, 그들과 깊은 연대성을 고백하십니다. 아울러 당신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음을,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고 또 당신의 몸과 피를 내놓으심으로써, 사람들에게서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이 당신의 일임을 밝히십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천상 잔치에 참석하여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도록 초대받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에게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영원한 잔치’가 벌어지는 ‘주님의 집’을 향하여 여행하는 길손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몸과 피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로써 이미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대접을 받으면서, 그분의 영원한 그 잔치를 미리 맞보면서,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이 살던 베타니아는 예루살렘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주 들르셔서 음식도 드시고 또 쉬셨던 곳입니다. 주님은 라자로와 그들 자매를 특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가난했을 것입니다.

  오늘 두 자매가 주님을 모시는 태도는 대조적입니다. 마르타는 음식 준비에 바빴고 마리아는 주님께서 편하게 쉬실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곤하셨지만 또 시장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우선 먹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안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떼지어 주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병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전파와 그리고 치유 안수에 주님은 지칠 대로 지쳤을 것입니다. 아주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이때 그 피곤한 말씀을 옆에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피로가 풀리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잘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집에서 편히 쉬시고 내 가정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웃 나그네를 그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며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7월 매일 미사에 산 위의 마을 광고가 나가고 나서, 많은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친절히 응대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방문하러 오시는 손님들을 안내하고 만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친절히 설명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 지금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과 또 오고 싶어 하시는 분들을 환대하는 것이 우리 산 위의 마을 식구들이 지금 해야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누가 우리의 나그네 손님입니까? 누가 지금 우리 곁에서 시중받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따뜻하고 편하게 모시도록 합시다. 그것이 복 받는 길이요 또 우리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그네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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